[미션에서 만난 사람] 양영자 선교사…몽골 주민들과 9년째 은혜체험 즐거운 시간 | ||
“너무 많이 변했어요. 촌사람 다 된 것 같아요. ‘인터넷 뱅킹’이 뭐 그렇게 복잡한지…” 2.5g짜리 작고 하얀 탁구공 하나로 세계를 제패한 뒤 1997년 라켓 대신 복음을 들고 하나님의 전령이 돼 몽골로 훌쩍 떠났던 양영자(한국WEC국제선교회 소속·42) 선교사가 1년6개월간의 안식년을 맞아 모처럼 고국을 찾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그녀는 지난 9년간의 선교 사역은 주님의 철저한 인도하심을 체험한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술회했다.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이 있는 삶,그것이 선교사의 길인 것 같습니다. 사람을 기대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흥분되는 삶이었어요.” #“나약한 인간이었어요” 여름에는 섭씨 40도,겨울에는 영하 45도까지 오르내리는 혹독한 기후도 그녀에게는 더 이상 어려움이 되지 못했다. 모래바람이 불 때면 입속에 모래가 가득 찼지만 즐겁기만 했다. 그런 그녀도 나약한 인간에 불과했다고 털어놓았다. 울란바토르에서 동쪽으로 450㎞쯤 떨어져 있는 동고비지역 ‘셍산들’에서 사역하던 2000년 2월에 왼쪽 안면근육에 마비가 왔다. “은근히 걱정이 됐어요. ‘영원히 정상이 되지 못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솔직히 하나님께 서운한 감정이 들기도 했어요.” 울란바토르 연세친선병원으로 치료를 받으러 떠나던 날 남편 이영철(45) 선교사가 말을 걸어왔다. “여보,당신의 입이 평생 삐뚤어진다고 해도 평생 사랑할 거야.” 가방 하나 들고 열차역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는 그녀에게 남편의 말은 큰 위로이자 힘이 되었다. “그 순간,웃음이 터져나왔어요. 이 사람이 정말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고요.” 병원에서 바이러스 감염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절망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수가 없었다. 고린도후서 1장4∼6절 말씀이 큰 위로가 됐기 때문이다. “내가 고난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위로하시고 나를 통해 다른 사람을 위로하게 하시려는 것이라는 말씀으로 저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됐어요.” 치료를 받으면서 점차 마비 증세가 사라졌다. “지금도 왼쪽 눈에 약간 이상이 있어요. 이 또한 교만하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믿어요.” 양 선교사 부부는 후미진 지역 셍산들에서 현지인 1명과 예배를 드리면서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성경말씀을 몸으로 체득하게 됐다. 매일 새벽 동트기 전 큐티를 시작,2시간여 동안 중보기도를 해나갔다. 그 결과 1기 사역은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주일 평균 예배 참석 인원이 40여명을 넘어선 것. 이어 2기 사역을 통해 이 선교사는 특별한 성과를 거두었다. 또 탁구 지도를 하며 사역의 지평을 넓혀갔다. #“낮은 자리로 가세요. 그리고 하나님만 기대하세요” 양 선교사는 선수 시절부터 은퇴하면 하나님의 종이 될 것을 다짐했다. 신학교 진학까지 꿈꾸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가 간암으로 돌아가시면서 2년여 동안 슬럼프에 빠졌다. 어머니의 투병생활을 지켜보면서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은퇴하고 제일모직에서 트레이너로 활동하던 그때 그녀는 연합통신 국제부 기자였던 남편을 인도네시아에서 우연히 만나게 됐다. 남편은 6개월 전 휴직까지 하고 선교 훈련을 받은 불타는 열정의 기독인이었다. 이를 계기로 자연스럽게 교제가 시작됐다. 1992년 5월 결혼한 뒤 남편은 이듬해 퇴직,선교사의 꿈을 키워갔다. “한국선교훈련원(GMTC)에서 6개월간 선교훈련을 받은 뒤 이태웅 GMTC 원장님이 선교사로 나가기 전에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하셨어요. 그래서 남편이 총신대 신대원에 진학했지요.” 신학공부를 마친 남편과 함께 선교사로 나가기 앞서 그녀는 1996년 자유로운 영어구사를 위해 호주로 어학연수를 떠났다. 거기서 WEC국제선교회를 알게 되고 6주간 단기선교 교육을 받게 됐다. 이후 WEC 선교사로 허입돼 선교지로 떠났다. 선교사들이라면 공통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녀교육은 하나님이 책임져주셨다. 두 딸 반재(13)와 윤재(12)를 위해 지난 3년간 홈스쿨링을 해준 로즈메리 우드 선교사는 7년간 영국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활동한 교육전문가였다. WEC선교회 출신도 아닌 그녀가 생면부지의 사람을 위해,그것도 척박한 땅 몽골에 자원봉사자로 온 것은 기적이었다. 아이들은 작년 9월 기숙사가 있는 대전기독국제학교(TCIS)에 진학,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양 선교사는 앞으로 매우 바쁜 일정을 소화해낼 계획이다. 두란노 바이블칼리지에서 성경을 보다 체계적으로 공부하는 한편 전문적인 치유 상담 코스도 이수할 것이다. 또 중국어도 지속적으로 배우려고 한다. 이 선교사는 한동대 통역번역대학원 응용언어번역학과에서 언어학 석사과정을 이수하게 된다. 이 때문에 이들은 주말부부,주말가정이다. 자녀들은 대전,남편은 포항,그녀는 서울에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녀는 선교사로 떠나기 전 국가로부터 매월 받는 연금 100만원을 어떤 노 목사 앞으로 돌려놓았다. 대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재정 공급을 의지했다. “주라 그리하면 채우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기 위해서다. “그동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않았어요. 하나님 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새로워요.” 양 선교사의 고백은 경험을 통해 얻는 살아있는 메시지다. 함태경 기자 zhuanjia@kmib.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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